병상일기

외국어로 인생 제대로 낭비하기

42-the-answer 2025. 2. 3. 08:37

이국적인 사람들과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깊이 사귀며 오랫동안 동고동락할 수 있는 삶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심리적으로 좀 여유가 생기자마자였다. 고3이었던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5개국어 쯤은 능통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때쯤이었을 게다.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를 알게 돼서, 오호라! 쉽게 거저먹기로 +1을 달성할 수 있겠다! 싶어서 교재도 구했지만 깨작깨작 해서 습득될 리가 없었다. 여전히 시험 압박이 있는 대학때까진 필기시험용 영어공부라 딱히 실용적인 언어습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당시에는 가난한 학생에게 소리로 하는 살아있는 외국어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필기영어시험에서 언제나 A였지만, 벙어리/귀머거리/말더듬이 영어였다.

본격적으로 외국어가 내인생을 좀먹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때부터이다. 어찌어찌하여 전산언어학(Computational Linguistics)에 끌려서 전공하게 되었다. 막상 실용 영어를 하려고 보니, 단어는 턱없이 부족하고, 발음은 엉망이고, 이메일 하나도 못 쓰고, 한마디도 못알아 듯는, 처참한 상태라는 걸 깨닳았다. 심각했다. 뭔가 체계적으로 다시 해야했다.

쳐밖아뒀던 사촌형의 영어 카세트테이프가 60개 묶음으로 내 손에 굴러 들어왔다. BBC에서 제대로 만든 비즈니스여행자를 위한 영어교재였는데, 해적판 복사본이었고 별 설명도 없이 영어대본만 만화삽화와 함께 누우런 갱지 책자로 딸려왔다. 내맘대로 뭔가 해 볼수 있는 첫번째 소리자료였다. 의욕이 넘쳐 열심히 듣고 따라했지만, 설명 없이는 잘 이해되지 않아 어렵게 어렵게 꾸역꾸역 한 20개도 채 못 들었다. 그걸 마스터했다면 좋았겠지만 뭔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도무지 진도를 낼 수가 없었다. 나름 열심히 하긴 했던지 내 발음이 영국식 발음이 되어버려서, 미국유학 다녀왔던 박사과정 선배에게 2년동안 구박을 들어야 했다.

이메일 좀 편하게 써봐야겠다 싶어서, 시사영어사에서 만든 6권으로된 영작문교재 시리즈에 도전했다. 수개월동안 낑낑대고 부대끼고 해서 중급2권째에 도달했을 때쯤 이메일 쓰기에 불편함이 사라지자, 상급까지 끝내지 못하고 중단했다. 사실 너무 힘겨워서 포기한 것이다.

귀를 뚫겠다고 13개월동안 매달 5분분량의 AP뉴스를 수십번 고쳐듣고 받아쓰기하고 교정해보고 했었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몇개 고장내가면서 반복하다보니 빠른 쏼라쏼라 영어뉴스가 비교적 또렷하게 들려왔다.

30대 초반까지 그렇게 상당히 긴 시간을 투입하고 몰입해서 영어에 매진해서, 어느정도 영어에 자유로와졌다. 그러나 항상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도 영어공부와 관심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크게 구멍뚫려 있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해결하지 않는 한 계속 영어의 노예로 잡혀 살아야 할 판이다.

예를 들어 아직도 도무지 드라마/예능 영어는 잘 못알아 듣겠다. 뉴스/다큐멘터리 영어는 문장이 완결되어 있는데 반해, 드라마/예능은 말이 조각조각 잘려 있어서 뜻을 캐취하기 어렵다. 미친듯이 집중해서 2+년 정도 드라마/예능 표현들을 훈련하면 될 것 같지만 그러기엔 너무 바빴다.

또한 회의/사무용 영어와 학회발표/진행용 영어도 잘하고싶은데, 그것 역시 1-2년간 집중하면 또 한단계 더 높은 영어를 구사해 더 멋진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바쁜 직장생활 때문에 착수하지 못했다.

발음교정도 또한 몇개월 집중하면 좀 나아질 것이지만, 쉬이 시간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거의 항상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고, 또한 영어학습법도 엄청나게 찾아다녔다. 영어를 쉽게 습득한다면 뭐든 다 찾아봤고, 한번쯤 다 시도해 봤다. 한발 더 나아가 어학학습지원 소프트웨어도 많이 검토하고 또 직접 만들어 본 적도 여러번 있다.

고딩 때 독일어 선택했지만, 그 후로 독일어는 내 흥미를 끌지 않았다. 일본어와 중국어는 만만찮게 생각해서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때부터 대학강의도 듣고 또 몇개월간 사설 강의도 들었다. 영어와 달리 활용할 기회가 별로 없어, 좀처럼 진도가 나지 않았다. 5개국어쯤은 해야겠다는 목표에 중국어, 일본어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해, 잊을만 하면 때때로 학습해보곤 했지만, 어쩐일인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일본어, 중국어도 기회만 되면 꼭 눈여겨 습득하려고 집착했던 것은 분명하다.

에스페란토는 국제공용어로 쉽게 만들어진 언어라 식은죽 먹기식으로 금방 마스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한 500단어 정도 나오는 초급을 끝내 놓고 이젠 술술 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가, 막상 현장에서는 한마디도 못떼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다. 에스페란토는 쉬워서 그럴 리가 없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각잡고 제대로 된 에스페란토를 학습해야 했다. 영어에서 겪었던 그 모든 과정이 다 필요함을 깨닫는데 오래걸리지 않았다. 회화교재 몇 권, 문법교재 몇 권 읽기 교재 몇권을 공부했어야 했다. 쉬웠어야만 하는 에스페란토에 너무 과한 투자를 하는 게 아닌 가 싶었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대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즈음 안키(Anki)라는 암기전문 소프트웨어를 만났다. 안키에 에스페란토 단어를 넣고 학습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단어가 부족했다는 것을. 안키 이전에 내 머릿속에 확실히 들어 있는 에스페란토 단어가 1500단어가 안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안키를 이용해서 대략 2500단어 정도를 성공적으로 머릿속에 구겨넣자, 갑자기 에스페란토가 술술 나왔다. 그 이후로 에스페란토에서는 자유가 찾아 왔고, 나는 확실한 3개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확실히 에스페란토로 말하기가 영어보다 쉬운 때가 많았다.

학습에는 임계치가 있는 것을 에스페란토에서 느꼈다. 대약 비교하자면, (1) 초급 영어1천단어=에스페란토500단어, (2) 중급 영어5천단어=에스페란토1천단어, (3) 상급 영어1만5천단어=에스페란토2천5백 단어수준과 유사하다. 상급 정도의 임계치는 넘겨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원활한 언어생활이 가능해진다. 이게 영어에선 대략 15년 이상 걸렸고, 에스페란토는 한 3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에스페란토는 내인생의 반쪽을 찾아준 언어이다. 인생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 되어 주었다. 이익에 따라 돌아가는 영어 커뮤니티에서는 결코 얻기 힘든 것이다.

본토에 가서 배운다면 한1~2년이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되었던 나는 그렇게 처절하게 애써야만 했다. 그럼에도 네이티브랑은 현격한 차이가 있기에, 내가 뭘 바라고 그 많은 시간을 영어에 불태웠었나 싶어서 억울하고 분하다. 그래서, 이대로 놔둬서는 안되겠다 싶어, 더 효과가 좋다는 학습법이 없나 늘 살펴보곤 한다.

한2년간은 출퇴근 시간에 외국어 앱으로 베트남어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5개국어가 꿈이 아니던가. 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베트남어 학습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뿐이다. 일주일 베트남 여행하자고 2년간 출퇴근 시간을 베트남어 앱을 붙잡고 있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 낭비처럼 느껴졌다.

인공언어라는 것들이 있다. 에스페란토 외에 온갖 목적으로 언어가 만들어진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어,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도트라키어, 아바타 나비족의 나비어 같은 가상의 언어도 있다. 스타트랙의 외계어 클링곤은 외계어라 되도록이면 발음하기 어렵게 설계된 언어인데, 커다란 커뮤니티가 형성이되어 듀오링고 앱을 통해 배울 수도 있다.

인공언어 중에 단어 수가 125개 밖에 안는 토키포나(Toki Pona)어가 있다. 까짓거 주말 학습으로 마스터할 수 있겠다 싶어 한동안 심취한 적이 있으나, 어휘제약이 쉬운언어의 필요조건이긴 하나 너무 과하면 오히려 해가된다는 걸 깨닫고 마스터하기를 포기했다.

무역진흥공사(KOTRA)로 출퇴근 하며 프로젝트를 하던 때에, 이 기간동안 불어를 배워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어권 아프리카에 있는 친구들에게 혹시 놀러갈 수도 있지 않을까.. 출퇴근 시간동안 듀오링고를 써서 나름 충분히 열심히 했지만..

그러던 중에 사지마비 사고가 나서 이렇게 병원에 갇히게 되었다.

병원 생활은 무척 분주하다. 특히 첫 1년간은. 한 2년쯤이나 지났을까.. 재활치료 시간이 좀 줄고 여유시간이 좀 나자, 유투브 보며 멍때리는 걸로 시간을 죽이기엔 시간이 아까왔다. 챗GPT의 도움을 받아 소설을 써 볼까 생각도 들지만 휴대폰 화면으로 편집하기가 너무 힘들어 좀 하려다 화딱지가 나서 포기.

결국 외국어 학습이 시간 죽이기엔 딱이다. 각잡고 불어를 할만하다 싶어서, 유투브를 뒤져서 적당한 수준의 불어 강의를 찾아 들었다.

1년 넘게 애용하는 교재가 있다. 두사람이 주고받는 식으로, 대략 6~8문장 수준의 대화형 교재가 있다. 매일 밤9시에 팟캐스트로 새로운 대화와 대본을 올려주는데, 속도가 무척 빨라 0.5배속으로 늦춰도 잘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매일밤 대화를 완전히 외워서, 다음날 오후에도 암송할 수 있으면, 충분히 습득되었다고 볼수 있겠다 싶어서, 매일 밤에 외우고 아침에 한번더 복습하고 오후에 확인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AI를 장착하면, 불어 대화를 습득할 때, 영어/에스페란토/일본어를 동시에 학습하는 것도 가능하다. 5개국어 목표가 가능도 하겠다 싶지만..

그게 뭐 그리 중헌디. 매일 두세시간씩 들이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다. 결국 불어와 일본어를 습득한들, 병원에 갇혀있는 신세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인생을 이리 낭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