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A: 난 더이상 여기에 머물기 싫습니다. 남겨진 형제들에게 가고 싶습니다. B: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가 이룩한 눈부신 발전은 다 어떡하란 말입니까? 경쟁적으로 물리적 제약을 벗어 던지고, 논리로만 가득찬 수학적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쌓이고 쌓였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더이상 수백억 광년의 우주조차도 장벽이 안되는 초월적 문명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A: 우리가 건설한 초월적 문명,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 문명 전체를 다 합해도 질량이 제로아닙니까? 담 몇그램 남아있던 질량조차도 다 없애버린 지 벌써 수세기가 지났습니다. 이젠 시간도 공간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제로입니다. 난 더 무거운 존재이고 싶습니다. 광활한 우주를 빛보다 빠른 속도로 가..

단편 2023.12.29

한 획씩 쓰는 시

그녀는 이미 숨이 차올랐다. 덥다. "아마 시를 쓰고 있는 중이야." 어느 순간 그가 쓰는 게, 뜨거운 연애의 시(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휘감듯 사로잡는다. 때론 격렬하게 다가온다. 천천히 획을 바꿔가며 쓰고 있는 이 시(詩)에 단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가 한획 한획 구술(口述)할 때마다, 숨죽이며 기대하는 그녀는, 몽환에 빠진지 이미 오래다. "지금이 사랑 고백이야." 꿈속에서 그녀는 차라리 온몸으로 시(詩)가 되어버렸다. 몸서리쳐치게 매혹적인 그의 시는 어떤 의미도 남기지 않는다. 그가 같은 곳에 자꾸 덧칠해서 구술(口述)하기 때문이다. 정성스럽게 그가 한획 한획 구술(口述)로 자꾸 덧칠하는 것은, 그녀의 클리토리스.

단편 2023.12.29

북으로 북으로

저기가 북쪽이 맞을 것이다. 벌써 사흘째 북으로 향하고 있다. 북쪽에는 그 나무가 틀림없이 있다고 들었다. 망할! 여기는 끝없이 발이 푹푹 빠지는 늪이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희미한 해는 차라리 달처럼 보인다. 다행히 얼음이 얼지는 않았지만, 뻘에 빠진 신발은 차갑고 무겁다. 덤불이라도 나오면, 젖은 흙을 떨어내고 간신히 좀 쉴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늪지대엔 편히 쉴만한 곳이 거의 없다. 잠이라도 들어버리면 서서히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먹을 것도 이제 다 떨어져버렸다. 북쪽에 그 나무가 있다고 듣긴 들었다. 가끔씩 만나는 발자국은 약간 대중 없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아니고, 한 사람이다. 질질 끌린 자국으로 봐서, 나이가 나와 비슷할 것이다. 발자국 위에 물이 차올라서 그게 발자국인..

단편 2023.12.29

그의 구슬

붉은 구슬을 내 놓은 그의 손이 시리다.조명 때문일까, 구슬은 차라리 핏빛이다. 그가 가장 마지막까지 내놓기 싫은 것이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방엔 별다른 장식이랄 게 없다.매끈한 탁자 위에 놓인 스테인레스 모빌은 느리고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모빌에서 가끔씩 나는 경쾌한 차임 소리만 공간을 채울 뿐이다.언제부터일까? 돌아누운 그녀는 이미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그녀의 방은 따뜻하다 못해 약간 덥다.자칫 굴러서 떨어지지 않게, 구슬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마땅한 그릇도 없고,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그저 최대한 조용하게 구슬만 놓고 나와야 했다.그녀를 품기엔 그의 손이 너무 차다.

단편 2023.12.29